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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히트곡 '전우가 남긴 한마디' 가수 허성희…박 대통령, 서거 며칠 전 직접 불러

“전우가 못다 했던 그 소망 내가 이루고야 말겠소”   지난 1977년 발매된 노래 ‘전우가 남긴 한마디’ 가사 중 일부다. 곡이 나온 지 47년이 흘렀음에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만 되면 현충일, 한국전쟁(6.25 전쟁) 기념식 등 각종 행사장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허성희씨를 지난 14일 만났다. 그는 남부 콜로라도 한인회가 주최한 공연을 마치고 LA에 들렀다.       노래를 불렀을 당시 20대 초였던 허씨는 “군인들을 위해 나왔던 노래가 이제는 호국영령을 기리는 노래가 됐다”며 “노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 감사하다”고 밝혔다.     허씨는 이날 자신의 데뷔곡이기도 한 '전우가 남긴 한마디'의 탄생 비화부터 당시 연예계 생활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전했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세상밖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노래를 발매해 줄 제작사를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허씨는 “제목부터 대중과 거리가 먼 노래다 보니 많은 제작사가 거절했다”며 “나조차도 이 곡이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던 중, 당시 한국 최고의 원판 제작소라고 알려진 성음제작소에서 음원 제작을 맡게 됐다.     허씨는 “원래 외국 노래 원판만 만들던 곳이라서 제작을 안 할 줄 알았지만, 성음제작소 창업주인 이성희 회장이 ‘이름도 같은데 같이 작업해서 이름값 한 번 해보자’라고 유쾌하게 말하며 음원 제작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성음제작소가 만든 첫 한국 가요 앨범이 됐다. 곡이 처음 나왔을 때 분위기는 냉담했지만, 곧 히트곡이 됐다.     당시 6.25 전쟁의 아픔과 월남전의 상흔이 남아있는 시대상과 맞아떨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정권에서 이 노래를 좋아했다.     허씨는“(박정희) 정권에서 많이 밀어준 노래”라며 “정부에서 전국 군부대에 노래를 틀게끔 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허씨는 수많은 군 위문 공연 무대에 올랐다. 그는 “당시 나만큼 위문 공연을 많이 한 가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군복부터 군화까지 다 차려입고 무대에 선적도 있다”고 전했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군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사망 며칠 전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허씨는 “박 대통령 서거 며칠 전 청와대에서 나를 포함해 희극인 김희갑, 작곡가 길옥윤 등 연예인 몇 명을 불렀지만 나는 캐나다 공연 중이라 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당시 청와대에 들어간 김희갑 선생님께 전해 듣기로 박 대통령이 ‘허성희가 없으니 내가 불러야겠구먼’이라고 하며 ‘전우가 남긴 한마디’를 직접 불렀다고 한다”고 말했다.     노래는 군부대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     연예계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허씨는 “대중과는 멀었던 ‘전우가 남긴 한마디’가 대중에게 환호를 받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당시 ‘판도가 바뀌었다’라는 언론 보도가 나올 만큼 대중들도 이 노래를 좋아해 줬다”고 덧붙였다.     허씨는 지난 1977년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 이제는 어느덧 47년 차 가수다. 지난 1979년 말 샌호세로 이민 와서 지난 2012년까지 미국에서 거주했다. 공백도 있었지만, 음악 활동은 꾸준히 해왔다.     그는 지난 2022년 ‘우린 더 행복할 거야’, ‘다시 오는 가을’, ‘나를 보러 오세요’ 등 3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허씨는 “지금도 6월만 되면 ‘전우가 남긴 한마디’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여러 가수가 불러준다”며 “기회가 되면 내가 리메이크해서 재발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대통령 허성희 히트곡 전우 가수 허성희씨 대통령 서거

2024-08-15

노무현 전 대통령 13주기 추도식 엄수…"나는 깨어있는 강물"

노무현 전 대통령 13주기 추도식 엄수…"나는 깨어있는 강물" 문 전 대통령 퇴임 후 첫 공식행사로 5년 만에 참석 여야 정치권 집결…정부대표로 한덕수 국무총리 참석 노무현 재단, 추모객 1만2천여명 추산   (김해=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 추도식이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엄수됐다. 노 전 대통령 기일인 이날 오후 2시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 옆 생태문화공원 잔디동산에서 13번째 추도식이 열렸다. 노무현재단은 추모식에 참석한 3천여명을 포함해 참배객 등 1만2천여명이 봉하마을을 찾았을 것으로 추산했다. '나는 깨어있는 강물이다'가 올해 추모식 주제다. 추도식을 기획한 노무현재단은 정치대립을 해소하고, 노 전 대통령이 바란 소통과 통합의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자는 취지를 담아 주제를 정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 후 10여 일 만에 엄수된 노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행사에 참석한 후 5년 만에 봉하마을을 찾았다. 지난 10일 퇴임 후 처음으로 참석한 공개행사다. 문 전 대통령 내외는 '상록수' 노래에 맞춰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나란히 추도식장에 입장해 맨 앞줄에 앉았다.   문 전 대통령은 추모식 때 별도로 발언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각료 출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공식 추도사를 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추억하며 문재인 정부 업적을 부각했다. 정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하려고 했고, 운명을 스스로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려고 애썼지만, 보수진영, 보수언론으로부터 '우리 주제에 무슨 균형자냐', '한미동맹이나 잘 챙겨라' 비아냥을 들었다"며 "그런데 문재인 전 대통령 5년을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세계 6위 군사 강국으로 우뚝 섰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약소국 의식에 꽉 차 있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재차 말했다.   이 발언에 박수가 이어지자 정 전 장관은 "이 박수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참석자들이 '문재인'을 연호하자, 문 전 대통령은 일어나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정 전 장관은 "이제 우리나라도 노 전 대통령 생전의 꿈인 줏대 있는 외교 철학을 되살려 국제정치에서 능히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약소국 의식을 버리고 자국 중심성 있는 외교를 해나갈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님,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언급했다. 정 전 장관은 "물길은 평지에서도 곧게만 흐르지 않는다. 강물은 구불구불 흐르면서도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생전 말씀처럼 우리 정치도 늘 깨어있는 강물처럼 바다로, 바다로 향할 것이라 믿는다"며 "깨어있는 시민, 아직 숨 쉬는 시민들이 그 꿈을 이루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도록 손을 내밀고 이끌어달라"고 추모사를 마무리했다.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시민 권력으로 탄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이유는 끝끝내 이루지 못한 그의 꿈 때문이다"며 "그의 못다 한 꿈이 시민 여러분의 힘으로 완성되길 진정으로 고대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추모제를 마친 후 문 전 대통령 등 참석자들은 대통령 묘역에 헌화 참배했다. 6·1 지방선거를 불과 일주일여 남기고 거행된 추모식에 여야 정치권이 일제히 모였다. 민주당은 윤호중·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박홍근 원내대표, 이재명 총괄선거대책위원장 등 지도부와 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집결했다.   이해찬·이낙연 전 대표와 한명숙 전 총리,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 민주당 원로 인사들도 참석했다. 변성완 부산시장 후보, 김동연 경기지사 후보, 양문석 경남지사 후보 등 지방선거 민주당 시·도지사 후보들도 함께 했다. 여권 핵심 인사들도 대거 봉하마을을 찾았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권성동 원내대표, 선대위 부위원장인 정미경 최고위원 등이 추도식에 참석했다. 정부대표로는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안부장관,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했다. 노 전 대통령 가족은 권양숙 여사, 아들 노건호 씨, 딸 노정연·곽상언 부부 등이 추모식 자리를 지켰다.   seam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노무현 대통령 대통령 퇴임 대통령 서거 대통령 부인

2022-05-23

유신 맞선 40대 김영삼… 미주에서 민주화 결의 불태우다

YS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신민당 총재로서 유신반대 투쟁에 앞장서던 1975년, 지금부터 꼭 40년 전 YS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던 역사적인 사진이 중앙일보 자료실에서 발굴됐다. 이 사진들은 당시 창간 1주년이던 LA중앙일보가 찍은 것으로 YS의 거침없고 당당한 40대 모습이 생생하다. YS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반대투쟁에 맞서 유신헌법과 대통령 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내용의 미주 중앙일보를 읽는 모습이 사뭇 비장하다.(사진 아래) 또 한 장의 사진은 ‘민주회복 투사 김영삼 총재’라는 한글과 ‘우리의 용감한 투사 김영삼 총재를 환영한다’는 영문 환영 배너를 들고 미주 한인들이 YS를 환영하는 모습. 왼쪽으로 YS의 측근 최형우 전 의원이 보인다.(사진 위) 최 전 의원은 이번 YS의 빈소에서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여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날인 23일 본사를 찾은 신동기씨는 1972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김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 대해 회고했다. 신씨는 “포용력이 있고 친화력이 아주 강한 분이셨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강하셔서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당시 그 결연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신 씨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국강연회를 열고 있을때 한국에서는 유신헌법이 발표됐다”며 “국내 정세가 좋지 않아 일본에 계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망명길에 올랐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많은 지지자들의 만류에도 귀국길에 오르셨을 만큼 강단이 있었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71년 도미해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던 신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활약(?)덕에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개인경호를 맡게 됐고, 매일 아침 금문공원에서 조깅도 함께 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워낙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분이라 매일 아침 1시간씩 조깅을 하셨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다른 사람들은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며 “운동을 하던 나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었다”고 추억했다. 신씨는 이것이 인연이 돼 80년대에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 모임인 민주산악회 SF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노승우, 김충일, 정윤철씨와 의기투합해 함께 활동했고 87년, 92년 대선때에는 한국의 전화번호부에서 주소를 찾아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뽑아달라는 호소문을 우편으로 수천통씩 보내기도 했다. 이후 노승우씨와 김충일씨는 귀국해 김 전 대통령을 도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병원을 운영하던 정윤철씨는 김영삼 정부시절 청와대 의무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신씨는 “1972년 방문 당시 경호를 하다 보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항상 조국의 민주화에 대해 얘기를 하셨다. 그런 열정이 군사정권을 종식 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며 “이제 모든일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편안히 눈을 감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정현 기자

2015-11-24

“정호야, 고마웠다…” YS 시카고 방문 중 수행한 부산향우회 유정호 이사장

“정호야, 시카고에 있는 동안 도와줘서 고마웠다. 앞으로 이곳에서 열심히 환자들 진료하고, 또 좋은 일도 많이 해라.” 신경내과 전문의로 활약하고 있는 유정호 부산향우회 이사장은 30여년 전 시카고를 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신민당 총재)을 모셨던 사흘간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군사 정권의 감시와 견제를 피해 미국을 방문,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던 중 시카고를 방문했었다. 유정호 이사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내 경남고등학교 선배다. 역시 경남고 선배인 김봉현 변호사가 ‘김영삼 선배가 시카고에 오셨으니 너를 소개 시켜주마’고 절 데리고 나갔다. 그래서 사흘 동안 김 전 대통령을 모시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당시 한인타운인 로렌스길, 시카고 한인회관 등을 방문했었다. 그때 들렸던 한 한인업체의 주인이 사정이 딱해 보였던지 김 전 대통령이 자기가 갖고 있는 돈을 그 주인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자 보좌진 중 1명이 ‘우리도 지금 형편이 안 되는데 그 돈을 드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처럼 김 전 대통령은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생각하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매더고등학교에서 있었던 동포 강연회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당시 행사장은 김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온 동포들로 발디딜 팀이 없었다. 유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은 그날 강연회에 온 분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인사를 나눴다. 강연에서 ‘이 땅에 군사 정권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정착돼야 한다’고 역설하셨는데 이 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었다”고 기억했다. 오직 대한민국 민주화만을 외쳤던 김 전 대통령의 신념과 투지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유 이사장은 “정말로 민주화 정착을 위해 생명을 바칠 분이라는 것이 느껴졌었다. 정의를 위해서는 어떤 장애도 헤쳐나갈 분이란 믿음이 갔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1995년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는 짧은 악수 밖에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신념의 정치인이 가셔서 마음 아프다”며 “하나회 철폐, 금융실명제 실시 등 족적을 남긴 그 분의 업적은 길이 기억돼야 할 것”이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26일(한국 시간)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다. 영결식이 끝난 뒤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식이 엄수된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이승만·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장돼 있다. 박웅진 기자

2015-11-24

30년 전 YS 육필 편지…"동포들 통일 염원에 감동"

민추협 LA강연 후 감사 편지 민주산악회 홍사일씨에 보내 '민주 투쟁' 결의 생생히 담겨 지난 22일 서거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지금부터 꼭 30년 전 LA한인에게 보낸 육필 편지를 본보가 단독 입수했다. 두 페이지에 걸쳐 국·한문 혼용으로 유려하게 써 내려간 이 편지에는 '해외동포들이 민주화와 통일을 눈물겹게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굽히지 않는 민주화 투쟁 결의와 희망이 편지 전면에 마치 목소리를 들려주듯 생생히 녹아 있다. 이 편지는 1985년 9월 YS가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자격으로 LA에 강연 차 왔을 때 이 행사를 마련했던 홍사일(작고)씨에게 고마움과 격려를 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행사에는 한인 6000여 명이 모여 YS가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당시 호남향우회 회장이었던 김완흠(전 LA한인회장)씨는 회고했다. 홍씨는 YS와 친구처럼 지낸 막역한 사이로 한국에서 민추협 외곽조직인 민주산악회 초대 등산대장을 지냈으며, 도미 후 미주 민주산악회를 조직했다. LA폭동 후에는 폭동피해자협의회 회장도 지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이원영 기자 홍사일 동지 이역만리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늘 조국을 생각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홍 동지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지난 9월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홍 동지의 건강한 모습과 짧은 기간 동안에 생활의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굳건히 살아가고 있는 홍 동지와 부인을 뵙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때 참으로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홍 동지를 비롯한 그곳 여러 동지들의 뜨거운 환영과 헌신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나와 우리 일행을 뜨겁게 환영하고 격려해준 덕분에 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무사히 귀국하여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민주화 투쟁의 제1선에 서게 된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는 현정권이 여전히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외면하고,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과 분열을 강화하는 어려운 국면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우리의 손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민주화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민당과 민추협 및 모든 민주 세력의 단합된 투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홍 동지가 출국하기 전에 대장으로서 이끌어 주었던 민주산악회는 이제 전국에 2000여 명의 회원을 둔 커다란 민주단체로서 여전히 조국의 산하를 찾아 동지애와 민주화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지난 방미에서 내가 크게 감명 받은 것은 우리 교포들의 힘이 크게 향상되고, 또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눈물겹게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홍 동지가 이러한 재미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나는 귀국 후 생각한 바 있어, 분단된 조국의 통일문제, 해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해외동포들에 관한 문제, 파탄에 직면하고 있는 경제문제, 그리고 사라져가고 있는 민족정체성에 관한 문제 등을 가지고 진지하게 연구 검토하고 또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지난 11월 15일 개설했습니다. 나는 이 연구소가 지향하는 목적에 접근하고 조국의 장래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 있는 뜻있는 분들이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홍 동지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여를 부탁해 마지않습니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민주화된 조국을 이루고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홍 동지의 발전과 가정에 건강과 평화가 항상 함께 하길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부인께도 안부 전합니다. 1985년 11월 25일 김영삼

2015-11-23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앞장선 정치인"

뉴욕.뉴저지 일원에 설치된 김영삼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3일 맨해튼에 있는 뉴욕총영사관(460 파크애비뉴) 8층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김기환 뉴욕총영사 내외를 비롯한 공관 직원들의 조문을 시작으로 민주평통 뉴욕협의회 관계자 뉴욕을 방문 중인 해군순항훈련전단장 김종삼 준장 등 80여 명의 조문객들이 찾아와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었다. 한인 조문객들은 "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선봉에서 투쟁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하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민주평통 뉴욕협의회의 정재건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애도하는 마음이 크다"며 "대한민국 정치의 큰별을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은 군정에 대항하고 민주화에 앞장선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플러싱에 있는 뉴욕한인회(김민선 측) 사무국(150-03 노던불러바드)에 마련된 분향소에도 이날 하루 종일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 민주평통 미주지역회의 김기철 부의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미북동부지회 노명섭 회장 미 탈북자선교회 마영애 대표 뉴욕지역한인회연합회 최영배 의장 특전동지회 김대식 회장 등 30여 명이 분향소를 방문해 조문했다. 사무국 관계자는 "건물 앞 유리창에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붙여 놓고 조문을 원하는 한인이면 누구나 올라와 조문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나이 드신 어른들은 물론 젊은 세대까지 분향소를 찾았다"고 전했다. 노명섭 회장은 "한국에 실질적인 문민 정부가 들어선 것은 김영삼 정권부터"라며 "그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금융실명제를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뉴저지한인회관(21 그랜드애비뉴 #216-B)에 마련된 분향소에도 40여 명의 한인들이 찾아와 조문했다. 박은림 뉴저지한인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국민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며 "차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스승이 사라진 것"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한편 총영사관은 24~26일까지 사흘간 오전 9시30분~오후 5시 뉴욕한인회는 24일과 25일 오전 10시~오후 6시 뉴저지한인회도 24.25일 오전 10시~ 오후 4시 사이에 조문객을 받는다. 단 조화나 조의금은 받지 않는다. 서승재 기자 seo.seungjae@koreadailly.com

2015-11-23

加 한인들에겐 각별했던 YS 서거에 ‘애통’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GTA 일대 한인들은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로인 민주화외에도 한국과 캐나다 무비자 협정 체결 등의 업적 등을 생각하며 대한민국 큰 별이 진 것을 애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집권기간 중 지난 94년 캐나다와 무비자 협정을 체결했다. ◆이기석 토론토 한인회장 = 훌륭한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김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한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업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윤방현 한국노인회 부회장= 한반도 민주주의 정착에 선구자 역할을 한 거목이다. 이렇게 훌륭한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것은 모국에서 뿐 아니라 우리 해외동포들에게도 큰 상실감을 안겨줄 것이다. 모쪼록 김 전 대통령이 평안히 영면하길 빈다. ◆조영연 한카 노인회장: 우리나라의 위대한 지도자 서거해서 국민 모두가 슬퍼하고 있다. 너무 큰 별이 떨어져서 마음이 아프다. 그간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덕분에 우리나라가 현재 민주화가 됐다. 남북통일을 못 보고 작고한 사실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한인 김경민(노스욕/47) =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민주화의 거목이며 하나회 일시 척결과 금융실명제 등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사회적 기반을 닦은 대통령이라 생각한다. IMF로 김 전 대통령의 업적마저 가리워진 평가를 들을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든다. ◆박은혜(번/33)=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업적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캐 무비자 협정과 같이 우리 캐나다 한인들에게 피부로 와닫는 업적이 크다. 이 무비자 협정덕분에 캐나다와 첫 인연을 맺었고 오늘날까지 캐나다에 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캐나다에 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더욱 각별한 대통령이다. ◆박철진(마캄/52)= 김 전 대통령은 캐나다 한인들에겐 많은 일을 해준 대통령이다. 무비자협정은 김 전 대통령이 체결하고 온타리오주 운전면허 상호 인정도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추진해 성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캐나다 거주 한인 중 한명으로 김 전 대통령에는 감사한 마음이다.

2015-11-23

대통령 취임 후 새벽에 '양지설렁탕' 깜짝 방문 해장국 주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 LA를 5차례 방문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하던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으로 강연을 위해 LA를 처음 찾은 것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시절이던 93년 11월과 96년 9월 방문했고, 퇴임 후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 더 LA를 찾았다. 퇴임 후 방문은 남가주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장남 은철씨와 차녀 혜경씨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중 LA한인사회에 가장 기억되는 것이 대통령 취임 후인 93년의 방문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지금은 문을 닫은 LA한인타운 버몬트와 7가 코너의 양지설렁탕 식당을 깜짝 방문해 화제를 모았었다. 당시 이 식당을 운영했던 이기영씨의 회고에 따르면 93년 11월 어느 날 새벽 6시쯤 종업원한테 전화가 왔다. 종업원은 "큰일 났어요"라는 말만 남긴채 전화가 끊겼다. 이씨가 급히 식당으로 와보니 업소 앞에는 경찰이 사용하는 노란 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순간 '종업원이 식당 문을 열다 사고를 당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씨는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식당 안으로 끌려가다시피 했고 식당 안에는 검은색 정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씨가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자 그들은 "죄송하다. 주인이셨느냐. 사실은 오늘 아침 김영삼 대통령께서 이곳으로 식사를 하러 오신다"고 설명해줬다. 그들은 대통령 경호원들이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날 해장국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그리고 이씨에게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 날 이후 양지설렁탕은 대박을 터뜨렸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밀려왔고 손님들이 꽉꽉 찼다. 김 전 대통령이 앉았던 의자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앉으셨던 자리'라는 표식과 기사 액자가 붙기도 했다. 장연화 기자

2015-11-22

"다정다감 했지만 한다면 하는 강단있던 분"

1985년 민추협 강연회에서 대회장 맡으며 YS와 인연 '상도동 시래깃국' 기억 남아 "아주 다정다감하셨죠. 하지만, 남다른 강단이 있었어요." 지난 22일 새벽(한국시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오랜 인연이 있는 김완흠 전 LA한인회장(75·사진)은 "마음이 넓었지만 한다면 하는 성격을 가진 분"으로 김 전 대통령을 회고했다. 그렇게 때문에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은 이어 "상도동 시래깃국은 유명하다. 3당 합당 후 초청을 받아 시래깃국을 먹으러 갔는데 합당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줬다"며 "주위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따뜻하게 설명해 주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또 "김 전 대통령은 항상 식사를 할 때면 땅콩을 드신다. 이는 김 전 대통령과 자주 식사를 하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독특한 습관이었다"는 얘기도 전했다. 제 18대((1988~89) LA한인회장을 지낸 김 전 회장은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 고문, 재외국민 참정권 실현에 기여한 참실련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전주고와 성균관대 약대 졸업 후 약국을 개업한 뒤 사업체를 운영하다 도미한 김 전 회장이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A에서 호남향우회 회장을 맡고 있던 김 전 회장은 최근 별세한 김기성 전 LA한인회장이 설립한 민족문제연구소(당시 소장 최만석)의 부탁으로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의 초청 강연회 대회장을 맡게 됐다. LA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김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기 위해 6000명이 몰리는 성황을 이뤘다. 김 전 회장은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돼 대회장으로서 뿌듯했다. 김 전 대통령을 향한 당시 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며 "김영삼 대통령이 나중에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줘 고맙다는 서한을 보내줬고, 그 편지는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만나 미주 한인사회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는 김 전 회장은 퇴임 후에도 LA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지인들과 함께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2000년에 LA를 방문했을 때 특별히 만나자고 하시더니 대통령 재임 시절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그만큼 마음이 여리고 따뜻했던 분"이라며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이 떠나 아쉽다"고 애통해 했다. 장연화 기자

2015-11-22

김영삼<1927~2015>전 대통령 서거…"자신만의 채색으로 역사를 칠한 정치인"

JP, 'YS 제명안' 홀로 반대 "애증있지만 동년배로 우정" 관계기사 본국지 2,3면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오랜 기간 나와 정치 역정을 같이했다. 그 속에 정치적 애증의 기복(起伏)이 있었다. 어느 때는 동반의 친우였고, 때론 결별의 미움을 격하게 나누기도 했다. 22일 고인이 된 그와 나는 정치의 출발 배경이 달랐다. 상당 부분 다른 정치행로를 걸었으나 어떤 시대에는 국가 운영의 한 배를 탔으며 정치의 현역을 떠난 뒤엔 우정을 덥혀왔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이제 YS마저 유명(幽明)을 달리했으니 나는 세상이 평하는 소위 3김(金)씨의 마지막 생존자가 됐다. 조물주가 나를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 마무리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오호(嗚呼)라, 과연 이것이 나 자신이 걸어야 했던 길이냐'는 자탄(自嘆)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도 미숙하나마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3김 중 나만 혼자 남아 이들의 회고를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고인의 영정을 보면서 그런 상념에 잠겼다. 내가 고인을 처음 가까이서 본 건 5·16 혁명 이듬해인 1962년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극비리에 신당(민주공화당)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각계각층의 신진 엘리트를 신당에 합류시키고자 했는데 30대의 젊은 정치인 중에서 돋보이는 인물로 YS가 거론됐다. 54년 제3대 총선에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YS는 일찍부터 특출한 야당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 대해 많은 곳에서 추천이 들어왔다. 그를 공화당에 합류시키기 위해 내가 직접 만났다. 서울 한남동 유엔 빌리지에 있던 정보부의 안가(安家)였다. 나는 YS에게 "우리 혁명세력과 같이 합시다. 우리와 함께 협력해서 이 나라를 제대로 엮어 나갑시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내 제안을 거절했다. 정보부장이었던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혁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출하는 정치인은 당시 드물었다. 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굳은 신념을 가진 YS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신당 참여 권유를 깨끗이 중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때 YS에 대한 첫인상은 고집이 보통이 아닌 인물이구나, 외고집이 쇠심줄같이 세지만 거짓말은 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거였다. 70년대 유신과 투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야권은 김영삼·김대중 양두체제로 재편됐다. 김영삼은 신민당을 장악했고 김대중은 재야의 중심인물로 섰다. 79년 10월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당인 공화당 다수의 힘에 의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당 총재(박정희 대통령) 상임고문이었던 나는 그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신민당을 따돌리고 공화당·유정회 의원들만 모인 본회의에서의 변칙 투표였다. 헌정 사상 야당 대표를 퇴출시키는 일은 과거에 없었다. 나는 전날 박준규 당의장 서리가 박 대통령의 지침이라며 제명을 당론으로 제시했을 때 "아무리 각하의 뜻이라도 세상에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고 반대했다. 국회에서 제명안 투표를 할 때도 기표소에서 명백하게 부(否)표를 찍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백두진 국회의장은 "출석의원 159명 중 159표로 가결됐다"고 선포했다. 제명 사유가 된 것은 김영삼 총재가 뉴욕타임스에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민주화 압력을 행사하라"고 한 인터뷰였다. 그것은 사대주의적 자세로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제1야당의 총재를 국회에서 쫓아내는 건 순리와 상식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만 26세부터 국회의원을 시작했던 YS는 평생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의원직 제명 뒤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외침 속에서 그의 투지와 신념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가 내심 얼마나 속이 타고 박 대통령을 미워할까, 남달리 성격이 강한 사람인데 분심(憤心)을 어떻게 참아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며칠 뒤 YS 총재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돕는 사람으로서 사과의 뜻과 함께 제명안 처리 때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전달해 위로했다. "어떤 고난에도 맞선 신념·투지…평생 의회주의자" JP "3김 중 나 혼자 남아 그들 회고록 남길 줄 몰랐다" 그러고 얼마 안 돼 운명의 10·26이 닥쳤다. 박 대통령의 주검을 수습하고 10월 28일 청와대에 빈소를 차렸는데 YS는 첫날 일찍 문상을 왔다. 고마웠다. 그와 나는 눈을 맞추며 서로 손을 꽉 눌러 잡았다. 바깥 세상에서 보면 나와 YS가 상호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동년배의 우정 같은 걸 교환했다. 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고 나와 김대중·김영삼씨는 전두환 정권 아래 고초와 핍박의 대상이었다. 직선적인 도전의 승부사답다고 할까. YS는 84년 미국에 있는 DJ의 동의를 얻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조직을 주도했다. 그 무렵 고인은 청구동 나의 집에도 사람을 보내 "전두환 정권에 맞서 투쟁하자. 민추협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3김은 동병상련(同病相憐) 처지이긴 했지만 대응하는 방식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신 사람으로서 그 주변 인물이 저지른 정권의 허물을 남의 일 욕하듯 공격만 할 순 없는 입장이었다. 5·16 혁명 뒤 내가 창당하는 공화당 참여를 고인이 거부한 것처럼 20여 년 뒤 고인이 창립하는 민추협 참여를 내가 거절한 셈이었다. 각자의 길, 고잉 마이 웨이(Going my way)를 가던 고인과 내가 정치적으로 공동운명체가 된 건 90년 1월 3당 합당에서였다. 고인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김대중과 대선 경쟁에서 앞서려면 대통령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특유의 담대함이 있었다. 이질적인 세 개의 정치세력이 한 지붕 아래 모였지만 YS는 대통령직을 향한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그는 3당 합당을 위한 나와 노태우 대통령과의 첫 만남 때부터 "내가 통합 민자당의 총재가 되고 노 대통령은 명예총재를 하면 좋겠다" "내각제 개헌은 우리 쪽에서 아직 설득이 더 필요하니 공식 발표는 미루자"고 요청했다. 나는 "내각제 공식화는 좀 미루더라도 나라와 당에 질서가 있는데 민자당 총재는 대통령이 하시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고인의 권력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으로 나는 기억한다. 김영삼·김대중씨의 권력을 향한 집념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치열했다. 두 사람의 정치 스타일과 자세는 다르면서도 각자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YS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는 순발력과 결단의 역량을 보였다. 그의 언어는 직관에 근거한 직설적 표현을 보였다. 반면 김대중은 논리와 설득, 꾸준한 축적과 단계를 중시했다. 그의 주도면밀한 언어의 전개는 특출했다. 92년 민자당 대표였던 YS는 총선 패배를 대선출마 선언이라는 허를 찌르는 반전(反轉)으로 정치의 흐름을 바꿨다. 그해 4월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차기 대선주자로 YS를 밀기로 합의했다. 그 길로 나는 하얏트 호텔에서 고인을 극비 대좌했다. 내가 "차기 대권은 대표님께서 맡는 게 순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고통을 내가 다 씻어 드리겠다"고 말했다. 나의 이 말에 함박 웃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 경선은 끝난 거나 마찬가집니다. 앞으로의 정치생명도 계속 같이합시다"라고 얘기했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 YS는 93년 금융실명제를 과감히 도입하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는 한편 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나는 '5공청산 특별법'이 소급입법이라는 점은 반대했지만 YS의 역사적 응징에 감탄하고 내심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YS는 군부의 하나회 핵심 세력을 정리한 뒤 나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김 대표 놀라셨죠"라고 말했다. 이런 전광석화(電光石火)의 척결은 YS식 결단이 아니면 불가능했다고 나는 평가한다. 고인과의 갈등·불화는 세월 속에 퇴색해 이제는 추억이 됐다. 90년 10월 내각제 각서 파동이 일자 당 대표였던 YS는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에 내려갔다. 최고위원이던 나는 이를 '틀물레짓'이라고 비판했다. 고인이 집권한 뒤 민자당 대표가 된 나는 2년간 YS계 강경파의 견제와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95년 1월 탈당을 선언하고 따로 자민련을 만들어야 했다. YS는 훗날 회고록에서 나의 탈당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나는 그것이 고인의 진심이었으리라고 믿는다. 3김 시대는 오래 전에 마감했다. 사람들은 우리 셋을 '정치 9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정치 9단이 뭐냐는 물음에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것"이라는 말로 압축해 대답한 적이 있지만 정치 9단의 세계는 그 역설적 의미보다 훨씬 깊고 넓다. 국사를 다루는 능력과 경륜이 정치 9단의 요체이며 고인은 그 기준에 충실했다. 국민을 다스릴 만한 소양이 있기 때문에 YS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YS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채색(彩色)으로 역사를 칠했다. 그의 신념과 투지는 질풍경초(疾風勁草)처럼 어떤 곤란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인의 대통령 퇴임 후인 2001년 'YS 서도(書道)전'에 갔다. 그는 자신의 '榮光(영광)'이란 작품 앞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뇌와 고통의 시간은 길었다"는 뜻에서 그걸 썼다고 했다. 역사적 인물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 화려한 영광에는 몇 갑절의 고뇌를 심연(深淵)에 깔고 있기 마련이다. 고인의 정치적 생애도 성취와 좌절, 굴곡과 성공이 점철(點綴)됐으며 그 역사적 영광은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2015-11-22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한인들 추모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2시(한국시간)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고열 등 지병으로 지난 19일 오후 12시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21일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 등이 자리를 지켰다. 사망원인은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증으로 알려졌다. 애틀랜타 한인사회는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 추모에 나섰다. 한인회는 23일 오전 둘루스 리장의사에 김영삼 전 대통령 분향소를 마련하고, 5일 장을 지낼 예정이다. 애틀랜타 한인회 오영록 회장은 22일 “김 전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분”이라며 “이분의 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고, 미주 동포들이 조국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추도했다. 민주평통애틀랜타협의회 조성혁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행사장에서 접했으며, 같이 있던 모든 한인들이 안타까워 했다”며 “민주화에 앞장선 김 전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민주화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애틀랜타 총영사관(총영사 김성진)도 23일부터 25일까지 총영사관내 분향소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권순우 기자

2015-11-22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미주한인사회도 북한도 ‘애도의 물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18일 한국 곳곳에 분향소가 설치돼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각 분양소마다 노인부터 어린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이 찾아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으며 일부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서거 하룻만에 조전을 보내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또 미주한인사회도 갑작스런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 미주 한인들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에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며 큰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김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두 차례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 김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재미동포와 미국인 등은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재미동포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추모위원회에는 1972년과 1983년 김 전 대통령의 망명 시절에 직접 인연을 맺었던 인사 80여명이 참여했다. 샌프란시스코 등 북가주 지역 한인들은 남북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 헌신해온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경색된 남북관계에 새로운 화해의 계기가 마련되고 국내적으로도 갈등과 반목을 넘어서 국민적인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대통합의 전기가 되길 기원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회 김상언 회장은 “조국을 위해 평생 헌신하던 분이 돌아가셨다”면서 “병환 중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은 이날 오후 민원대기실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조문 시간은 오전 9시30분~정오, 오후 1시30분~오후4시30분까지로 지역 한인들에게 개방된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일(한국시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조전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김 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유가족들에게 보낸 조전에서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다는 슬픈 소식에 접하여 리희호 녀사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이어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애석하게 서거하였지만 그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남긴 공적은 민족과 함께 길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조전은 김 전 대통령 서거 하루만에 발표된 것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때는 이틀 후 발표했었다.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신속히 조전을 보냄에 따라 이번 장례기간 조문단을 파견할지도 주목된다. ■장례= 이명박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형식과 관련, 국장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과 김 전 대통령 유족측은 국장을 정부측에 요청했으며 정부는 19일 국무회의에서 최종 방침을 결정할 예정이다. 장례의 격을 국장으로 올리되, 6일장으로 해 일요일인 오는 23일 영결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절충안이 검토되고 있다.

2009-08-18

[시카고 한인들의 반응(무순)] '경제위기 극복한 지도자'…장기남(한인회장) 외

"한인 동포를 대신해 훌륭한 지도자를 잃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한국이 IMF 경제위기에 처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또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해 이산가족들이 상봉할 수 있게 한 것은 큰 업적이다. 평통위원으로 한국을 방문,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데 고통속에서도 꿋꿋이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고 한국이 현재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도록 기여하신 분이다.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전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주화 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의지의 정치인'…김덕규 전 국회부의장 5선 국회의원인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동지를 잃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김 전 부의장은 "명 대변인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김 전 대통령은 엄청난 시련과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의지의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현재 노스웨스턴대학 로스쿨 교환교수로 시카고에 머물고 있는 김 전 부의장은 시카고에서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잇따라 떠나 보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한인회에 차려진 분향소를 지켰지만 이번에는 한국에 들어가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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